어떤 촛불소녀와 야한 비키니 까는 소리


수감 중인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청원하는 비키니 차림의 시위사진이 논란이 된 후,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주목받고 있다. 다소 어수선한 이 글의 논점은 정리하면 대략 이런 것이다.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남성들이 말싸움만 하던 시기에 현장에 먼저 뛰어들어 긍정적인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투쟁해왔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나꼼수 열풍에 자극받은 여성들이 이제야 '성을 자극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의식을 가지고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투쟁을 무시하는 것이거니와 그간 여성들이 투쟁해온 방식과도 다른 것이기에 잘못되었다. 비키니시위방식은 남성 우월적 시각에서 여성의 성을 농락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지지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그간의 투쟁과 진실성을 매도하지 말라."

이 글 속에서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힘든, 혹은 쉽사리 동감하기 힘든, 혹은 그 자체로 앞뒤가 어긋나는 상당수의 명제들이 가정되거나 주장되고 있다.

첫째로, '시민단체와 운동권을 제외하면 시위의 구심점이자 도화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들에 의해 촉발되었다'라는 것. '시민단체와 운동권'을 제외한다는 자의적인 기준은 잠시 놓아두고라도, 그 외의 시위의 구심점이 여성이라는 주장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또한 역설적으로 저 주장에 따르면 '시민단체와 운동권' 진영은 남성 중심이었다는 것이 되고, 이들은 훨씬 오래전부터 조직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남성들은 더 오래전부터 정치일선에 참여했고, 이들을 제외하고 나서야 여성이 구심점으로 남는다는 결론이 된다. 이 말이 대체 무슨 뜻인가? 글쓴이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둘째로, '수많은 남자들이 인터넷에서 논객 노릇하며 자위하고 있을 때, 시위대 과반수이상의 감정적인 여자들이 조직적으로 시위에 뛰어들었다'는 것. 여기서 글쓴이의 뇌리엔 '시민단체와 운동권에 주도적으로 포진하고 있었을 남성들'대신에 '인터넷 논객 질에만 허우적대는 수많은 남성들'이 등장한다. 다시금 등장한 이런 대담한 자의적 기준선 위에서 여성들의 '참여'야말로 진짜 정치가 되며 남성들의 '날카롭고 이성적인 논평'은 입만 산 가짜 정치가 된다. 이런 언급은 외려 당신이 사랑하는 '참여'라는 것이 '이성적인 것'에 대립되도록-즉 무디고 비이성적이도록-보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그것은, '여성은 남성보다 지적으로 하등하다'는 명제에 충실하게 편승하고 있음을 아는가? 또한 그런 식으로 '참여/비 참여'를 나누고 있는 당신의 자신의 배타적인 방식이, 당신이 바로 지금 부당하다고 외치는 시각의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셋째로, 비키니시위방식이 '진보의 꽃이 되어 재잘거리며 신선한 활력소가 되어주는 여동생 역할은 공짜 나레이터 모델 같은 저 짓보다 더더욱 싫다'라는 것. 1967년 김포공항에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했다는 보도를 듣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개탄했을 한 부녀자의 사고방식이 나는 여기서 고스란히 보인다. 당신은 '여성'을 이용하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에 올바른 것과 부당한 것이 있으며, 당신이 '의식 있는 여성'이라고 구획화한 자들의 방식은 좋고 비키니 시위 같은 방식은 부당하다고 매도했다. 당신은 '여성'만의 방식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문재인을 '워너비시아버님'으로 지칭하고, 시위대를 위한 먹을거리 준비하는 것이 '여성을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인가? 그것은 여성의 어떤 감성적이고 포용적인 성격적 특성을 이용했다는 근거에서 '여성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여성의 몸'을 이용한 것은 왜 천박한 것이 되는가? 당신은 설마 여자의 노출이 천박하다고 생각하는가? 왜? 여성의 몸은 더러운 것이기에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가? 문제는 여성의 몸이 상품화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합리가 아니었는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운 신체의 일부에, 명백한 정치적 문구를 새겨 드러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성의 상품화이며, 왜 정치적 사건과 연계성이 떨어지며, 어찌하여 정당성이 없단 말인가?

넷째로, '이 사건의 주체가 젊고 풍만한 여성이며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50대 남성정치인의 석방이고 이 구도 자체로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불쾌한 무언가를 연상한다'는 것. 단언하건데, 그 불쾌감은 당신의 주장만큼 객관적이지 않다. 이 복잡하고 의미 있는 사건에서 '젊고 풍만한 여성의 가슴과 50대 남성 정치인'이라는 요소에만 눈을 돌리는 것은 편견에서 비롯된 건강하지 못한 태도다. 이 사건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대중에게 발언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부당하게 구속된 시민의 석방을 요구한 재치 있는 시위'라는 구도로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신에게 여성의 특정부위를 드러내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일 뿐이다. 무슨 탓인지를 모르겠지만 당신은 남성도 충분히 잘할 수 있어 보이는, '시위대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떡 돌리고 강연 듣고 하는 행위'는 여성으로서 자랑스럽지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이용하여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공짜 나레이터 모델 같고 치어리더가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주장의 함의에 대해서는 역시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분명하게 말하고픈 것은, 바라건데 부디 당신이 젊은 여자, 젊은 여자 운운하는 그 문단에서 등장한 '치어리더'나 '공짜 나레이터 모델'이 특정한 직업군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매우 부당한 의식을 반영한 것이 아니길 빈다.

나는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의 필자가 하고자하는 어떤 주장에는 동감한다. 나는 나름대로 호의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고자 했으며, 특히 일부 언론이 이제야 여성들이 정치 열기에 편승하여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는 식의 시각을 경계한다. 그러나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또한 현재 주요 논란이 되는 것도 그 이외의 메시지들이다.

우선 필자는 '여성들의 뒤늦은, 자극적 방식의 참여'라는 시각이 특정 언론의 것인지, 사회 전체의 것인지, 일부 남성의 것인지를 모호하게 설정한 후, 글 속에서 매우 자의적으로 '남성'이란 집단을 구획한 후 매도한다. 또한 필자는 '여성'이라는 집단 또한 자의적으로 분류하는데, 그에 따르면 자신의 방식을 택한 여성들은 진짜 정치를 오랫동안 해온 여성들이고, 이제 사진을 올려 동참한 이들은 '여성의 방식을 포기하고 뒤늦게 편승한' 종자들이다.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니 그것의 강도와 감성만이 무분별하게 증폭되고, 이 과정에서 일부 '여성'이나 '여성 전체'가 부당하게 매도되고 재단되기까지 한다. 자의적으로 구획된 '남성'에 대한 힐난은 두 말할 나위없다.

나는 도대체 누가 자꾸 남성과 여성의 편을 갈라 생각하며, 부당하게 한 쪽 성을 매도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글쓴이는 모피반대누드시위나 슬럿워크와 같은 것은 '근거가 있는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여 정당한 것이라고 하지만, '야하거나 누드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라는 판단은 순전히 주관적이다. 성폭행 근절을 외치는 데에, 야생동물의 학살을 반대하는 데에 꼭 옷을 벗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어떻게 필연적인 것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남성으로 점철된 사법부와 입법부의 꼰대들에게, "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 젖가슴, 함 눈 크게 뜨고 봐라! 거기에 뭐가 써져있는지 보고, 고개 쳐든 네 물건 잡고 고개 숙여 반성해라!"라는 식의 호쾌한 역설을 던질 수 있는 정당화에는 왜 그리 인색한지 알 수 없다. 혹시나, 슬럿워크나 모피반대누드같은 것은 기존에 서구사회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인정되어 온 것이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얼마나 사대주의적이고 보수꼴통같은 생각인가. 그대가 말하는 생활정치란 그런 것이었단 말인가.




p.s 윤복희는 67년 귀국당시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상은 이후에 만들어진 페이크다큐이다. 67년 윤복희가 귀국하여 데뷔하면서 미니스커트를 표지에 내세우고 광고에 출현하는 등의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비유적으로 '그녀가 미니스커트와 함께 귀국했다, 입고 들어왔다'라는 식의 보도가 등장했다. 물론 67년 당시에는 확인된 바로 그런 보도는 없었지만, 이후에는 그런 보도가 있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싶어 신경이 쓰이긴 했는데, Nickea님의 지적이 있어 내용을 덧붙인다.


'이중잣대'에 대한 어떤 걱정스런 집착 까는 소리



 이곳에서는 유난히 이중 잣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정치인들이나 평론가들 혹은 그 외 유명인들의 '이중적 잣대'는 때로 정말 치열하고 철저하게 까발려진다. 이중 잣대 하에선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평가의 방식이 임의로 달라진다. 현실정치에서 그것은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적과 동지에 대해 다르게 평가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어떤 준엄한 가치에 의거한 이데올로기적 웅변은 없을지라도 이중 잣대에 대한 비판은 열정적으로 제기되는데, 그것은 이 곳 이글루스를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 특히 주로 나타나며 20-30대 젊은 층에서 더욱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본질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에 대한 거부감은 논리적 이성이 보편공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특히 이곳에서 회자되는 매우 구체적인 논리적 이중성의 폭로는 광범위한 계층에게 회자되거나 이해될 수 있을 만큼 쉽지 않고 일반적 흥미를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수준의 여론에서는 누군가 어떤 주장을 했다고 하면 그가 대략 어떤 의도에서 어떤 진영을 위해 그런 말을 하였구나는 식으로 나름의 평가를 내린 후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지, 그가 이전에 했던 어떤 말과 혹은 어떤 논리구조와는 어떻게 모순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따지고 분석할 여력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게 주장하라'라는 것은 너무나도 타당한 요구다. 그리고 '이중 잣대'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모순을 도출하는 태도다. 'A는 B보다 길다'라는 말은 'A가 B보다 짧다'라는 말과 모순을 일으키는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예를 들면 각각의 상황에서 B라는 평가기준을 '이중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주장함으로서 이중 잣대의 태도를 범한 것이 된다.

 이런 너무나도 타당한 요구에 대해 '과잉'이라는 수사가 어울릴까? 이중 잣대에 대한 비판은 넘칠수록 좋은 것은 아닐까? 글쎄, 내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이중 잣대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은 맞지만, 오로지 논리적 정합성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고 집착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진지한 정치를 실종시키고 망상적인 정신의 부유만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모순'이라는 것을 잡아내는 것은 ①A=B ②A≠B 라는 두 명제가 동일 연역체계 내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수학이나 기호체계 내에서의 작업과 같이 언제나 수월하게 발견되진 않는다. 우선 엄밀히 따지면 '모순'이란 오로지 '명제와 명제간의 관계'에서만 도출되는 것이다. 너무나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지만, '모순적 행위', '모순적 행동'과 같은 것은 이에 따르면 어폐가 있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정말로 '모든 것을 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라는 것이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모순론의 논리적 언급은 여기까지만 하자).

 일상생활에서는 기호 수준의 모순이 확실하게 나타나진 않지만, 언뜻 보면 그와 비슷한 관계가 보일 때는 많다. 최근의 것으로는 '공지영의 일등석과 대통령 손녀의 패딩'에 대한 대중의 태도나 '화려한 휴가와 부러진 화살'에 대한 진중권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와 같은 것이 따끈따끈한 본보기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어떤 정치적 입장은 아니지만 외려 절대적 도덕률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일관된 판단 잣대에 대한 요구이다. 입에서 내뱉는 모든 주장의 명제들이 상호 모순되지 않게 하라! 이러한 '이중 잣대의 금기'는 거의 정언명령의 도덕률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현실이란 명제들의 체계만은 아니다. 또한 현실세계의 대상 사이에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가 공지영의 일등석에 찬사를 보내면서 손녀딸의 패딩에 격분할 때, 그는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모순된 태도라고 볼 수도 없다(그것은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자세는 매우 일관적이다. '미운 놈은 이유 불문하고 밉다'라는 원칙을 그는 본능에 가깝게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는 자신의 찬사와 격분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위해 논리적 담론을 구성해 내는데, 모순(혹은 이중 잣대)은 바로 이 때 그의 언술들의 관계에서 유추된다.

 그런데 문제는 외려 여기서 시작된다. '화려한 휴가'에 대해서는 "영화에 재현된 모든 상황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고"라고 언급하면서, '부러진 화살'에 대한 타인의 언급에 대해 "영화의 주요 내용이 해당 형사 재판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해서 사실의 영화화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태도는 모순처럼 보일 것이다. 도식화해보자. 우선, "A"는 '사실과 관련된 영화'이다. "B"는 '실제와 거의 일치함'이다. 이때 진중권은 화려한 휴가에 대해서 A=B라고 주장하면서, 부러진 화살에서 대해서는 A≠B라고 하는 셈이므로, 전형적 이중 잣대라 비판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A"라는 범주에 '화려한 휴가'와 '부러진 화살'을 같이 포함시키는 것은 사실 다소 자의적이며,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더불어 '사실과 거의 일치함'이라는 범주 B에 진중권의 문장과 허재현의 문장을 동일한 것으로 붙여 넣는 것에도 상당한 수준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다. 이를테면, 이런 항변이 궤변소리를 들을지언정 충분히 허용된다. "'영화 속 재현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라는 것과, '영화가 100% 사실묘사다'라는 것은 서로 상당히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라는 식으로.

 이러한 항변과 함께 복마전이 시작되는데, 논쟁의 근본토대 자체가 한 두 마디의 문장인데다 이것의 뜻풀이 싸움이기 때문에 과장하여 미화하면 분석철학적 수준의 논리적 게임이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지겨운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가 된다. 이 수준에서 생산적인 담론은 실종되고, 끈질긴 근성(?)을 가지고 꼬리를 물거나 상대편의 감정을 건드려 이성을 잃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여 논쟁의 승리를 자평하는 식의 귀결이 난무하는 것은 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논쟁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 다시 고려해보거나 진지하게 고찰할 기회는 논쟁 당사자들에게 풍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까 말했듯이, 모순을 지적받은 이는 애초부터 자신의 일관된 신념에 따른 행동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 것뿐이라고 분개할 것이며 그것을 끈질기게 지적한 이 역시 어떤 정치적 신념의 충돌을 시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논쟁 대부분은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가장 적나라한 '도구'일 수는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어떠한 정치적 내용도 담지 않은, 말 그대로 싸움을 위한 싸움의 장으로 변질되는 귀결을 맞는다.

 진지한 정치적 주장은 그것이 무엇이든 특정한 이론적 명제들의 연역을 기초로 한 이론들에 근거하여 제시되며, 거의 모든 이론은 각자의 취약한 논리적 약점을 갖는다. 이것을 줄여나가는 것이 학문의 진보와 겹치기는 하지만, 이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외려 이성의 종말로 귀결된다. 이쯤 되면 수학이나 기하학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라는 것이 이성의 발바닥과 같다면, 그것이 진행되면서 발바닥에 어느 정도 때가 묻고 그것을 털어내기도 하는 과정 속에 발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모순만을 집착하는 태도는 때 묻기가 두려워 한 치도 걷지 못하는 멍청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예술가는 물론이요 훌륭한 과학자도 되지 못하지만 건강한 인간일 수는 더더욱 없다.

 시대에 따라 숭상되고 집착되는 가치들은 변화한다. 아마 이 시대의 지금 이곳에서는 앞서 말한 '이중 잣대의 금기'가 하나의 시대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계급투쟁'이나 '자유 시장' 혹은 '민주화'나 '경제발전'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다르게, '이중 잣대의 금기'는 어떠한 정치적 주장도 형성할 수 없는 논리적 요소의 하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장을 위한 하나의 보조적 원칙이지, 그 자체로 신념도, 이론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이중 잣대를 지양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한 마디 조잡한 문장의 분별이 어떤 정책이나 거대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보다 긴급한 문제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중 잣대의 금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과 더불어서 더욱 증폭될 것 같은데, 특히 트위터와 같은 곳에 무심히 쓴 한 마디는 오늘도 범람하고 있으며 앞서 말했듯 오로지 이중 잣대에만 집착하는 정신은 바로 이 기록된 한 마디를 토대로 무자비한 살육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터넷의 특성과 더불어 20-30대 젊은 층에게 이런 정신이 횡행하는 것은 어쩌면 이념이 종말 했다고 믿어지는 시대에 그들, 아니면 우리를 단단하게 붙잡아 줄 어떤 가치에 대한 역설적 기갈을 대변하는 현상이라 볼 수도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를 믿는다고 말할 자신도, 맨큐가 옳다고 말할 자신도 없으며, 하나님을 믿기란 우습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이 진짜 나쁜 놈인지도 헷갈리지만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좋다고 말하기도 싫다. 이런 시대에서 논리적 무모순성이나 완벽한 합리성에 대한 숭상은 그것이 어떤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고 고립된 영혼에 길을 비추리라는 망상을 제공할지 모른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쉬이 '이것은 옳지 않다, 부정의하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것은 모순이다, 이것은 앞뒤가 다르다'를 지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련되어 보이고 떳떳한 확신을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형식 논리를 토대로 편협하게 프로그램 된 인간의 정신은 때때로 매우 천박하며 그것은 그가 그 자신을 지배하는 공리들의 성격을 의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은 명제체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의 정신에서 얄팍하게 작동하는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판단이 기초하는 토대라는 것이 '결정된 판결, 기존의 제도, 성립된 권위, 인정된 지식'에 대한 복종일 경우라면, 그러한 정신의 귀결은 때때로 탁월한 논리를 기초로 한 합리적 자살행위로 돌아올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중권이 쏜 '부러진 화살' 까는 소리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한겨레 허재현기자의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한 언급에 화살을 날렸다. 문제가 된 내용은 허재현의 트윗으로,
‘부러진 화살은 김명호 교수의 주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재판기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며, 자신은 부러진 화살을 보고 그 재판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놀랐는데 나중에 재판기록을 확인하니 재판과정이 100%사실 묘사였기 때문에 한 번 더 놀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은, ‘허재현기자는 영화의 주요내용이 형사재판의 기록내용과 일치한다면 픽션이 아니라 사실의 영화화로 봐줄 것을 당부한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다큐조차도 일종의 극영화로 봐야하기 때문이며 허재현기자는 의도적으로 정권교체를 위해 이런 부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주장에는 양자 모두 매우 상당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레토릭들이 뒤섞여 있어서 겉보기에는 매우 논쟁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을 짚어보면 대체 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조금 명확해질 것이다.

우선 나는 공판기록을 모두 확인하지 못했다. 4000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을 모두 확인할 시간도,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제작자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화 속의 재판 내용에서 사용된 대사는 실제 공판에 기록되었던 대사들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법부에서는 지금처럼 영화의 파장을 의식해서 조잡한 대응매뉴얼을 만들었을 것이 아니라, 명예훼손이나 사기죄와 같은 것으로 감독을 고발했으면 더 간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의 비판은 이 점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명호 교수의 변호인을 맡았고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로 극화되기도 한 박훈 변호사는 진중권의 언급에 대응하여 관련 공판기록을 인터넷 상에 순차적으로 모두 공개할 것이라고 했다. 허나 영화대본과 공판기록이 마치 복사본처럼 일치해도 진중권의 주장은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다.

진중권은 실제로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 자체, 그러니까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도 극영화와 같은 것으로 봐야한다며 자신의 석궁을 장전했다. 예를 들어, 화제가 되었던 ‘남극의 눈물’과 같은 것 또한 남극의 현실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문제가 있으며, 혹은 ‘2차 세계대전의 전모’라는 식의 제목을 가진, 실제 인물과 전쟁 영상들만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것은 분명히 타당하다. 그러나 그의 비판이 가진 철학적 성격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분석적으로 검토해보자. “모든 영상물은 특정한 시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는 하나의 인위적 프레임으로서 ‘사실’ 자체로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문자 기록물에도 마찬가지이며, 모든 기록 매체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반 히틀러의 육성과 영상기록물과 속기록 등등을 모두 동원한 두 개의 영상물이 있다고 치자. 하나는 독일네오나치주의자들이 만든 것이고 하나는 미국자유주의연맹이 만든 것이다. 이 둘 모두는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자료(fact data)들만으로 가득한 것은 인정되겠지만, 나치주의자들의 영상물을 보고 ‘이것이 히틀러의 진실이었구나!’하면서 감동하거나 ‘역시 히틀러는 미치광이였구나!’하고 분개하는 양자의 태도는 모두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것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기행문학, 에세이, 심지어는 신문기사에도 적용된다. 적어도 오늘날의 수준에선, 조선일보와 한겨레 모두 ‘대체로’ 사실만을 바탕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양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웅변한다(이걸 ‘프레임이 다르다’라고 전문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헌데 이런 입장으로 나아가면,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의 지위가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대체 ‘사실’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실인가? 그것도 문제가 있다. 기록된 영상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시각 또한 그가 서있는 위치, 각도, 시각, 편견, 상황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전두환이 기억하는 80년대는, 광주에서 죽은 오라비의 묘비 앞에 향을 피우는 여인네의 기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둘은 자신들의 눈으로 사실들을 본 사람들이다.

이러한 눈으로 ‘부러진 화살’을 보자. 그 재판 장면이 공판기록을 그대로 대본으로 사용하여 읽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사실’이 될 수 없다.

왜? 첫 번째로 공판기록에 기록된 A라는 문장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것은 실제 재판 속에서 기록관이 들리는 말 그대로를 적은 기록이다. 재판장에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억양과 표정,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 진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영상으로 기록한 것만큼의 진실성Reality를 ‘받아 적은 문장’이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1차적으로 ‘사실’은 다소 ‘부족해’진다.

둘째로, 기록된 공판기록의 A라는 문장을 배우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따라, 이제 ‘부족한 사실’에는 ‘픽션’이 개입한다. 배우, 혹은 감독은 A라는 문장을 자신의 이해력과 배경지식, 편견, 판단력 등을 통원해 맥락을 파악하고 그에 합당할 듯해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와 뉘앙스와 억양으로 표현한다. 이 단계에서는 ‘부족한 사실’ 정도가 아니라, 사실에 해석과 과장과 왜곡과 가감이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연극이 된다.

셋째로, 그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은 어떤 카메라 앵글로 담는가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것이 좌우된다. 판사 역을 맡은 문성근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상태에서 대사만 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유독 그가 악독하게 보이는 얼굴 옆선을 보여준 상태에서 대사를 하게 할 것인가? 이제 이 단계는 허구를 바탕으로 한 장치예술의 단계까지 상승된다.

넷째로, 이 영상을 편집하고, 배경음악이나 음향효과를 조정하는 단계에서 이것은 이제 ‘영화’의 단계에 들어서고, ‘사실’은 거의 먼지조각만큼도 남지 않게 된다.

이토록 엄밀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맥락에서 ‘심지어 다큐조차도 일종의 극영화로 간주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극영화를 사실로 봐달라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요구죠.’라는 진중권의 주장이 작동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중권의 주장은 철학적 반실재론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반실재론은 연역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까지 나아가며, 이는 가장 엄밀한 회의주의를 내포하는데 진중권은 ‘fiction과 fact의 경계를 흐려가며 도덕과 사법의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팩트’ 즉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입장임을 유추할 수 있다. 사실 그가 반실재론자였다면 안티조선운동의 창립멤버였다는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어차피 모든 시각이나 보도가 개인적 주관이고 편견일 뿐이라면 조선일보를 비판할 근거는 왜소해지기 때문이다.

작금의 논쟁에서 진중권이 뜻하는 ‘사실’이란, 최소한 PD수첩이나 현장취재르뽀와 같은, 실제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에 대한 녹취나 영상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것이 상식적인 관점에서 인정되는 ‘사실’이고, 그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반실재론적인 입장이라면 PD수첩의 스폰서검사보도 또한 주관적 독단에 불과하지만, 진중권은 그런 식의 반실재론을 웅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 그렇다면 진중권의 말대로 영화 ‘부러진 화살’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다. 물론 때때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그 배역을 맡은 연예인에게 해코지를 하는 어르신들이나 정신병자들이 있기는 한데, 이 경우야말로 허구를 사실로 잘못 이해한 일반적인 상황이며, 진중권의 비판은 이러한 인식오류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꾸짖음이 된다.

진중권의 날카롭고 합리적인 화살은 그렇다면 허재현에게 명중했는가? 허재현의 주장은 정확히 무엇이었나? 다시 보자. ‘(부러진 화살은)재판기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고, 재판기록을 토대로 영화가 재판과정을 100% 사실 묘사하고 있으며,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면) 픽션이 아니라 사실의 영화화로 봐줄 것을 당부한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부러진 화살’의 영상이 ‘PD수첩’이나 ‘소비자고발’과 같이 실제 영상을 촬영한 것이라는 뜻이었나? 그것은 결코 아니다. ‘100% 사실 묘사’는 ‘100%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100%라는 말에 의심스런 강조가 있지만, 뒤에 ‘묘사’임을 명시했다. 진중권은 아마 100%라는 말이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75% 사실기록’ 혹은 ‘사실 묘사’라는 표현을 했어야 흡족했을 것인가?

허재현은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상물이 실제촬영영상기록물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재판기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라는 문장은 무리하게 곡해하지 않는 한, 그냥 평범한 설명일 뿐이다. 이것이 거짓이 되려면 아마도 ‘김명호교수재판’이라는 사실과 그 기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혹은 그것이 ‘부러진 화살’의 영상 속 묘사와는 일치점이 전혀 없는 다른 사건이어야 할 것이다.

‘픽션이 아니라 사실의 영화화로 봐 달라.’는 말은 어떤가? 허재현은 이것이 사실의 ‘영화화’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화’라는 단어는 그 의미에 기본적으로 각색과 재구성을 통한 영상화를 내포한다. 물론 허재현은 이것을 픽션과 대비되는 어떤 것으로 표현하고 있기에 ‘논픽셕’의 맥락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부러진 화살’을 엄밀히 논픽션 장르로 분류하는 것에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대체적으로 논픽션이라고 하는데, 현장르뽀와 같은 것도 강한 의미의 논픽션이라고 하기 때문에 ‘논픽션’의 의미를 매우 엄밀하게 적용하면 ‘부러진 화살’은 약한 의미의 논픽션이 될 것이다.

이런 지루한 논증이 불필요할 정도로 명료한 사실은, 허재현이 ‘부러진 화살’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되는 영상물이 현장취재영상과 같은 ‘사실’을 담고 있다고 의미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허재현은 이것을 “만들어진 영화”, “묘사”, “영화화”와 같은 단어를 분명히 사용하고 있기에, 그는 허구를 진실로 착각하는 정신착란을 선동한 것이 아니다.

진중권의 석궁은 앞서 말했듯 그러한 정신착란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리고 보았듯 허재현은 그런 착각을 저지르지 않았고, 따라서 진중권이 쏜 화살은 빗맞아 부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진중권의 의도가 그런 단순한 착각을 정조준 한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며, 내가 보기에 물론 진중권이 그렇게까지 순진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인 언급에 불과한 것을 굳이 빗나간 논리로 잠식시키려 드는 그의 의지는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고, 그 의지는 별로 떳떳한 게 아닐 것 -이 표현들은 모두 진중권이 허재현을 비판하면서 사용한 표현들을 응용한 것이며, 나는 이 표현들이 진중권을 비판하는데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다고 생각된다-이다.’

결론 내리자. 진중권의 주장을 엄밀히 검토했을 때, ‘사실은 존재할 수 없다’는 반실재론적 입장과 ‘드라마·영화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두 종류의 해석이 가능한데, 전자로 이해하면 그의 다른 주장들과 심각한 모순이 생겨 일관된 주장으로 성립될 수가 없으며, 후자로 이해하면 그것은 허재현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그가 늘어놓은 문장만으로는 도대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진중권이 허재현에게 그리하였듯, 우리는 행간과 맥락을 짚어보는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진중권은 허재현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했다. ‘100% 사실묘사’라는 언급은 다소의 과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허재현의 주장은 아무리 악의적으로 해석해도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썩 어울리진 않는다. 진중권이 보기에 ‘떳떳하지 못한 의지와 부당한 방법을 통한 정권교체의 의도’가 이러한 문장에 담겨있다고 한다면, 나는 역설적으로 곰곰이 따져보았을때 누가 봐도 맥락을 잃고 둥둥 떠 있는 그의 주장 속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사람들이 ‘부러진 화살’을 실제로 오인하여 사법부에 대한 광범위한 증오와 광기로 분개할 것을 진중권은 우려할 것이다. 나도 그것이 염려되며, 충분히 동감한다. 그러나 허재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나쁜 의미에서 그렇다. 사리가 맞지 않는 말로 부당하게 비판을 하고 있으며 행간에서 자의적인 의미를 찾아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진중권은 자기 의도의 순수성도 항변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번에는 논리적인 면마저도 취약하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다.

진중권은 사람들이 허재현의 트윗을 보고 ‘와, 이 영화가 PD수첩같은 실제 영상이구나’라고 착각하고 흥분할까봐 불안해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재현의 문장에서 도출되기 힘든 결론이기에, 그렇게 읽는 이들의 착각을 지적해야 마땅하다. 하물며 진중권은 대중의 착각과 무지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기에, 아마도 그런 착각을 경계하기 위해 허재현을 희생물로 삼아 장렬히 석궁을 날린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착각하고, 글을 읽으며 난독으로 왜곡하는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안개를 걷어내고 곰곰이 본다면, 누구라도 그가 쏜 화살이 ‘부러진 화살’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 2 3 4 5